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르스트 슈만 (문단 편집) == 본격적인 만행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e6df97cdea1d19328f158f6309ffc4d5.jpg|width=300]] 맨 왼쪽에 [[카를 클라우베르크]] 가운데가 호르스트 슈만 1939년 10월 초에 나치의 장애인 안락사 계획 [[T-4 프로그램]]에 참가한 슈만은 뷔르템베르크의 그라페네크에서 안락사 책임자가 된 후 주로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가스살해를 실시했다. 1940년 6월에는 존넨슈타인(Sonnenstein)에 있는 가스 실험실에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실험 대상자를 물색하고자 종종 아우슈비츠에 들르기도 했다. 1941년 7월 28일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부임한 슈만은 [[요제프 멩겔레]]를 비롯한 다른 [[매드 사이언티스트|과학자]]들과 동료로서 아주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X선]]을 이용한 불임화와 거세실험 일명 "X-선 실험"을 시작했다. 슈만은 아우슈비츠 가스 실험실의 책임자로 임명된 뒤 실험 대상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다른 친위대원들과는 달리 유대인 수감자들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존칭까지 사용하며 말을 건넸고 이러한 태도 때문에 유대인들은 쉽게 속아 넘어 갔다. 호르스트 슈만에게 호감을 갖고 유대인들이 휴양소라고 알고 갔던 곳은 '''호르스트 슈만이 운영하던 존넨슈타인 가스실이었다.''' 1942년 가을에 가스실 전문가로 인정받게 된 호르스트 슈만은 총통실의 명령을 받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의학실험실에 부임했다.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지던 여러 실험들 중에는 거세 방법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호르스트 슈만이었다. 그는 힘러로부터 매일 3000~4000명의 포로들의 생식능력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빅터 브라크와 함께 연구해서 X-선 불임장치를 고안해냈다. 슈만이 매일 실험한 수천 명 중에서 2~3%만 사망했다고 가정해도 1942년에서 1944년 4월까지 죽은 사람의 수는 수만에 이를 것이며 다른 범죄들을 합하면 약 1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59445|#]] 호르스트 슈만은 이 '''의학 장치'''를 가지고 의학실험실에 부임하게 되었고, 이 장치로 실행한 생체실험은 실험집단을 대상으로 [[방사선]]을 이용했을 때의 불임 가능성 여부를 실험해보는 것이었다. 유대인 수감자들 사이에서 다른 친위대 장교들과는 달리 정중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소문난 슈만은 실험대상자들을 직접 자기 손으로 골랐다 그는 젊고 건강한 유대인 남녀만을 골라서 여러 차례 방사선을 쏘이게 했는데, '''그 결과는 참혹했다.''' 방사선에 쬔 부분은 화상을 입고 곪아버렸으며 이런 증세는 내장에까지도 영향을 끼쳐, 결국 피해자들은 살이 썩어 들어가거나 방사능 화상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며 사망해 갔다. 게다가 이 실험은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심각해서 특히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은 이 방사선으로 인해 2차성징에 장애가 생겨 수많은 아이들이 죽을 때까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외에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선발한 다음 그들을 발가벗기고 5-8분 동안 X-선을 쐬게 한 다음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고무호스를 팽팽하게 덮씌운 막대기를 희생자의 항문에 쑤셔넣었다. 이후 남자의 전립선을 계속 건드리면서 정액이 나올 때까지 자극해 정액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를 통해 실험의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실험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방사선을 쬔 남자의 고환과 여자의 나팔관 끝에서 난소를 잘라내기도 했는데, 물론 실험조건을 변화시키지 않기 위해 실험을 실시할 때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로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극심한 고통속에 자신들의 성기가 잘리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슈만의 거세장치는 매일 1천 명의 사람들을 불임시켰고 여자 수인들은 거의 모조리 사망할 정도로 실험은 잔혹했다. 심지어 살아남은 자도 수개월에 걸쳐서 불임효과를 조사하기 위해서 생식기관을 절개당해야 했다. 이 실험은 주마다 2, 3차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한 번에 약 30명 정도의 여성이 실험대상이 되었으며, 남자 수인들에겐 고환만을 적출하여[* 남자 성기를 마취도 안 하고 칼과 도구를 비롯한 수술 도구로 잘라냈다.] 태양광선에 쬐는 실험을 실시한 후 '''그렇게 잘라진 고환과 난소를 잘라내서 일부를 브레슬라우에 있던 법의학연구소로 보내기도 했다.''' 당시 실험에 사용된 젊은 건강한 남자들 중에는 그리스의 유대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수많은 유대인들을 희생시켜서 얻은 결론은 너무도 단순했다. 1944년 4월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에게 제출된 호르스트 슈만의 보고서에 의하면, '''"불임 시술에 방사선을 이용하는 것은 별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환이나 난소를 제거하는 데에는 6~7분이 소요되고 그 결과도 확실한 데에 비해서 방사선 시술은 더 많은 비용이 들면서도 효과가 매우 낮기 때문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